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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딸기 내음이 솔~솔 단맛까지 끝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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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경력 11년차 강남규 씨 부부의
친환경 딸기 출하 ‘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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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4월 23일(화) 21:19 [순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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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순창신문 | | “농사에는 이제 일가견이 있을 것 같아요”라는 기자의 말에 강남규 씨는, “농사는 평생 배워야 하는 것 같아요”라며 겸손해 했다.
바로 금과면 남계리에서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 강남규(50)씨다. 지금 순창은 딸기를 흙에 심는 토경재배가 아니라, 고설재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고설재배는 코코피트라는 야자 열매나 껍질을 분쇄해 흙대신으로 쓰는 것으로, 농업인에게는 청정 환경을 제공하는 결과를 얻고 있다.
야자수 열매나 껍질의 분쇄품으로 기른 딸기는 주변환경이 청정함은 물론 맛 또한 일품이다. 빨간 딸기에서 솔솔 풍겨나오는 딸기 향은 봄철 입맛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보면서 입맛이 돌고, 한입에 넣으면 설탕처럼 달달한 끝맛이 기분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하루 평균 100상자가 넘는 딸기를 출하하고 있는 강씨는 IMF때 귀농해 딸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새벽 6시부터 출하작업을 시작하는 강 씨 부부는 하루가 짧기만 하다.
강 씨의 부인 히토미유리에(48)씨는 성실한 남편 강 씨를 무한신뢰하는 한 사람이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 힘쓰는 일은 남편보다 더 잘한다. 할머니들이 따 놓은 딸기를 나르는 일은 히토미 씨 몫이다.
남편 강씨는 아내 히토미 씨가 날라다 준 딸기를 선별하는 일을 맡는다. 그러면서, “아내는 딸기를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만들어요”하며 한마디 한다.
그렇게 강 씨 부부는 재작년에는 8천박스를 출하했다. 올기준 현재 출하량은 6800박스다.
집에서 농사지어 딴 딸기를 이용해 부인 히토미 씨는 딸기 쨈도 만든다. 조금씩 만들어 만들어 팔고 있기 때문에 큰 벌이는 되지 못하지만, 식품허가까지 내서 팔고 있다.
딸기, 메론, 오디, 복분자 작목반의 반장을 맡고 있는 강 씨는 “전국 최고의 딸기를 생산해내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담양 와우리 딸기를 최고로 쳐주고 있는데에 대한 부러움과 승부욕이 강 씨를 끊임없이 채찍질 하고 있다. 최고의 딸기 생산을 위해 수십군데를 방문해 다른 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익산, 정읍 등 좋다는 데는 빠짐없이 다 가봤다. 그런 강씨가 “이제는 금과 딸기가 와우리 딸기를 따라 잡았다”며 한숨을 돌린다.
담양 와우리 딸기가 도매시장에서 순창딸기보다 3천원 정도 비싸게 경매되고 있지만, 2kg 한 상자에 들어있는 한 팩 중량이 700g정도가 되는데 반해 순창 딸기는 1팩에 550g정도밖에 안돼 중량에서 차이가 난다. 결국 와우리 딸기는 1팩이 더 들어가 있는 샘이라 중량을 따져보면 가격이 똑같다는 것이다.
또 담양 딸기는 작년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반해, 순창 딸기는 작년에 비해 50%나 가격이 상승했다. 경매장에서의 2kg 딸기 한 상자 가격이 작년에는 8천원이었던 것이 올해는 12000원으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 씨는 이런 현상에 대해 도매시장에서도 순창딸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강 씨는 또 흙대신 쓰는 코코피트에 대해서도 다년간의 노하우를 발휘하고 있다. 코코피트는 보통 길게는 7년까지 쓸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보통 3~4년 정도 되면 갈아줘야 한다. 코코피트가 부식되기 때문이다. 부식이 되면 물빠짐이 나빠져 영양있고 맛있는 딸기를 재배할 수 없다고 한다.
때문에 강 씨는 처음부터 코코피트를 거친 것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거칠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거나 물빠짐 등이 좋지 않아 어려움이 좀 있으나, 차츰 좋아지면서 길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딸기 농사를 지으면서 강 씨 부부는 삶의 보람도 함께 짓고 있다.
강남규 씨의 딸기 농사에 대한 한마디
농사짓기가 어려울수록 주민들의 단결된 힘 ‘필요’
강씨 부부는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딸을 낳기 위해 아이를 더 낳았다고 한다. 셋째까지가 모두 아들이다.
강 씨는 도시생활에서의 힘겨움 때문에 몸이 안 좋아져 IMF 때 부모님 집에 내려왔다. 부모님 밑에서 몸도 추스리고 농사일로 힘든 부친도 도울 겸해서 겸사겸사 내려온 것이 귀농이 돼버렸다.
지금은 작고한 부친 옆에서 농사일을 거들다 보니 농사가 재밌었다. 신기했다. 조금만 땀을 흘리면 수확할 수 있는 농사일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농사짓는 것을 봤을 때하고는 다른 농사였다. 해볼만한 것이었다. 몸을 추스린 강 씨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다행히 11년 전 두 해의 딸기 농사를 부친과 함께 해 본 경험으로 큰 어려움없이 지금까지 정진하고 있다.
올해로 11년째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토지나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농사라는 게 평생 공부해야 하는 것이며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조언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농사짓기 또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주민간의 단결된 힘과 행정적인 지원이 어려워져가는 농업을 살릴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딸기는 14개월 농사라고 할 만큼 정성을 많이 필요로 하는 농사라고 한다. 3월에 어미모종을 심어 9월이 돼야 어미모종에서 나온 새끼순을 잘라 9월말까지 정식을 한다. 정식한 새끼 순을 정성껏 키워야 탐스럽고 맛좋은 딸기를 따낼 수 있다.
부인 히토미 씨의 한국생활
부인 히토미 씨는 종교를 통해 남편인 강 씨를 만났다. 일본이 아닌 한국으로 시집와 한국음식을 하게 된 히토미 씨의 어려움은 정말 컸다고 한다.
한국에 온 히토미 씨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한국음식이었다. 일본에서는 고춧가루나 참기름, 마늘 등을 많이 넣지 않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일도, 만드는 일도 히토미 씨에게는 모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음식에 대해서 배우고 음식을 시작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고인이 된 시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만드는 일 때문에 하루 새끼 밥먹는 일조차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 때 가장 생각났던 마음의 고향은 일본의 부모형제들이었다.
하지만 갈 수가 없었다. 부모가 바라는 것이 딸자식의 행복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힘들다고 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히토미 씨는 부모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종교적인 신앙을 통해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졌었던 히토미 씨는 음식과 인사법이 다른데서 오는 어려움을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친정부모를 생각하며 극복해냈다.
히토미 씨는 지금은 모든 어려움을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성공하는 삶이란 남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스스로 행복한 생활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삶,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고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고생해야 성공한다고 그녀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르게 살다보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지배적이다.
보통 결혼의 조건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일이나 농사짓는 일은 여성들에게는 반가울 리 없는 조건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들은 종교적인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 행동하다 보면 나쁜 조건도 또 하나의 행복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다.
근면〮성실로 기술하나라도 더 터득하려고 연구〮노력하는 자세로 생활하는 남편이 그녀는 존경스럽다. 처음 시집왔을 땐 남편도 자기 생각만 맞다고 하는 사람 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남편 강 씨를 변화시킨 것은 아내 히토미 씨였다.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람간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히토미 씨의 생각을 남편 강 씨도 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과 조화롭게 살고, 남의 더나은 기술과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열려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고 더 나은 기술을 연마할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생각하는 사고의 편린들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이웃 사람들의 성격과 습관에 대해 조심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사람들은 한 개인 개인이 나서면 주장과 소신이 확실해 강한 반면, 단체나 여럿이 모인 곳에서는 단결이 안돼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며, “ 이것은 한국사람들의 단점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음식과 인사 예절문화가 맞지 않아 힘들 때 힘을 낼 수 있게 용기가 돼 준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마을 주민들. 일제치하의 세월 속에서 내려온 눈물과 한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부모님 생전에는 그 앞에서 커가는 아이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것은 미안함이었고 죄스러움이었다. 사죄의 뜻으로 부모님 뜻에 따르고 부모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하다보면 조금은 응어리가 된 마음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해 히토미 씨 그녀는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며 회상했다.
“한국 사람들은 주체성도 강하고 자립심도 강하고 창의적이다.”고 칭찬하는 그녀가, “한국은 일본보다 더 발전해야 하고 그렇게 가고 있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날 한국의 아픈 역사를 이해하기 때문에 부모 앞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던 그녀는, 요즘은 남편 강 씨와 아이들 일본어 교육 문제를 놓고 종종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남들은 돈들여 학원도 보내는데 일부러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는 점이 서운’한 강 씨의 말에 아내 히토미 씨는, ‘이제는 가르칠만도 하지만, 농사짓고 바쁘다 보니 가르칠 짬이 나지 않는다’며 남편을 이해시킨다.
하지만 히토미 씨의 생각은 다른데 있는 듯 했다. 일본 사람들은 자식에 대해 ‘교육열이 그렇게 높지 않다’라는 말로 넘겼지만, 히토미 씨의 눈빛에서는 ‘급하게 가르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할 것 같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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